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쏠쏠한 간호사피셜

간호사 태움에 대한 경험과 개인적인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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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제가 간호사 조직의 '태움'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간호사의 '태움'이라는 것이 몇 년 전에 화두가 되어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것 같아요. 코로나 시국을 거쳐오면서 의료계가 어려움을 겪고 이 문제가 더욱 불거지면서 이제 끊이지 않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을지대 병원에서 20대 초반의 어린 신규 간호사분이 극단적 선택을 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뉴스 기사를 읽으면서 그 간호사분을 향한 정말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제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신규 간호사 때 느꼈던 감정과 그냥 잊고 싶었던 안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나서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상처 받고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들은 계속 따라다니며 오랫동안 그 사람을 괴롭힌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움과 관련해서...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신규 간호사였을 때는 차트를 던진다거나 심한 신체적 폭력은 없었지만 가끔 뭔가 실수하고 있으면 등짝을 세게 후려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 으레 허용되는 신규 간호사에게 수치심과 모욕감 주기라던지, 감정이나 의견 개인 사정은 모두 묵살하고 조직의 룰을 따라야 하는 문화 등에서 정말 숨 막히고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개인적인 정말 중요한 일로 근무를 바꾸고 싶었는데 신규 간호사라는 이유로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말하며 비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선배 간호사, 수간호사 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보호자 앞에서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간호사인 것처럼 무안을 주고, 같은 데이 근무 번인데도 제가 잠시 타 부서에 들렀다 돌아와 보니 데이번은 저를 기다리지 않고 저만 빼고 모두 퇴근했던 그때 느꼈던 감정 아직도 생생하네요. 난 너무 바쁘고 몸이 힘든데 스테이션에서 앉아 웃고 떠들고 수다 떨던 선배 간호사들, 밥도 못 먹으며 일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신규 간호사들은 말라가고 선배 간호사들은 살찌니까 너희가 계속 살 빠지니까 우리가 너희 부려먹는다고 욕먹는 거 아니야(근데 이건 팩트..)라고 신경질 내며 말하고, 신규들이 도와주니까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안 도와주기로 했다고 당당히 말하고 나는 바빠 죽겠는데 손 하나 까닥 않던 선배들.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 아주 세세하게 디테일한 경험은 많이 흐려졌지만, 그때의 감정만큼은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들 땐 신규 간호사 때의 병원 꿈을 꿔요. 막, 근무 시간이 다돼서 지각할 것 같은데 어쩐지 길을 찾지 못한다거나, 환자들에게 주사를 주었는데 다 잘못된 약이어서 다 어레스트(심장마비)가 오고 난리가 나서 다들 나를 탓하는 눈초리- 이런 꿈을 꾸면 꿈속에서는 정말 압박감이 느껴지고 힘들다가 깨고 나서 '아, 꿈이다 꿈이어서 다행이다'라고 안도하기도 해요.

 

보통 '태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는 것 같아요.

하나는, 간호사 개인의 인성 문제이다.

둘째는, 태울 수 밖에 없게 하는 의료계 업무 환경의 문제이고 이것이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태움이 '간호사 인성 문제'인 것으로만 치부된다는 건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같은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도 자제력이 높고 인내심과 배려심이 많아서 남에게 상처 주지 않고 성인군자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요. 그래서 그런 분들이 더 인정과 존중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좋은 인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에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란 것이 흑과 백처럼 명확히 나뉘는 것도 아니고 그 중간 회색 지점이 존재합니다.

누구나 본인이 처한 상황과 주변의 영향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고 실수도 할 수 있고 자제력을 잃거나 화도 내고 흥분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어딘가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실 님께서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봤을 때 살아오면서 내가 좋은 사람이었던 적도 있고 실수를 하거나 의도했건 아니건 나쁜 마음을 먹거나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사람이었던 적이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한 근무에 신규 간호사 혼자 봐야 할 환자가 40명이라고 쳐요. 어떤 곳에서는 실제로 40명보다 많은 경우도 있지만 40명이라고 칩시다. 그 사람들의 바이탈(혈압, 맥박, 체온, 호흡-활력징후 측정)을 측정하고, 혈당 수치도 재야 하고, 약도 주어야 하고, 중간에 소소한 컴플레인이나 봐줄 것들도 봐줘야 하는데 만약 환자 한 명당 15분씩 봐준다면 600분 이미 10시간입니다. 근무시간이 8시간이라면 이미 오버타임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환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산에 입력도 해야 하고, 검사실에 간다거나, 차트를 작성하고 문서를 정리하고 인계를 해야 하면 인계 준비도 해야 합니다. 중간에 걸려오는 전화도 받고, 의사 처방도 받고,  오류가 있으면 수정하고, 만약 응급상황이 생기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응급처치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또 그에 따른 전산과 서류를 정리하고.. 보호자나 환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설명도 해야 합니다. 사실 여기 다 적을 수도 없을 만큼 손이 많이 가고 소소한 일이 정말 많이 있는데, 그런 일들을 처리하고 환자를 봐주다 보면 밥을 먹으러 갈 수 있나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 방광염이 생기는 경우도 흔하고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다 보니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경력 간호사도 힘든 과중하고 많은 업무를 신규 간호사가 혼자 처리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차분하게 생각해서 업무를 하고 재 확인을 하고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실수도 잘 발생합니다. 사소한 실수라면 그러면서 배운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큰 의료사고로 이어질 확률도 높을 거예요. 정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하루를 보내게 되겠죠.

그러고 나서 퇴근 전 인계를 줄 때는 높은 확률로 선배 간호사에게 인계를 주게 됩니다. 당연히 정신없이 하루가 흘러갔고, 빠뜨리거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을 텐데- 인계를 주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횡설수설하게 되면 다음 근무자는 일을 시작하기도 힘듭니다. 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 업무 파악이 안 되고, 그래도 경력자라 내공이 있어서 눈치껏 일을 한다고 해도 앞 근무자가 빠뜨리고 간 것들, 실수한 것들을 계속 해결하면서 앞 근무자의 실수로 인한 컴플레인을 각 부서나 보호자, 환자에게 들으며 안 그래도 바쁜 일이 엉망이 된다면요? 그 간호사도 다음번에게 인계를 주어야 하고 이것이 제때 정리가 안돼서 그 모든 것으로 인해 하루가 너무 힘들어지고 퇴근도 늦어진다면 이럴 때도 화가 나지 않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모욕적 언행, 폭력적 행동을 보이고 '태움'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늘 기분 좋게 호의적인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기란 어려울 거예요. 잘 참을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냥 근무 자체가 여유가 없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서로 잡아먹는, 그런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기 쉬워질 수밖에 없는 조직 문화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떠나서 생각해봐도 미국 등 다른 선진국과 비교를 해 보아도, 간호사 퇴사율을 보더라도, 경력자는 다 떠나고 신규간호사로만 채워지는 병원의 현실만 보더라도, 현재 우리나라 간호사 근무환경과 처우가 부당하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입니다.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과중한 업무로 인해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높은 자제력과 자기 통제를 요구하는 환경에서는 더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고, 그렇다면 대개 남을 위한 감정 조절을 포기하고 살아남는 쪽에 에너지를 쓰는 것을 택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모든 일들이 바쁘게 돌아가고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정신 에너지를 쓰는 와중에ㅡ모든 근무자가 높은 자제력과 통제력을 발휘해서 성인군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간호사 인성 때문이라고만 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고 그저 간호사 개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겠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 개선에 대한 아무런 노력 없이 아주 쉽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아마 그래서 병원 이익만 생각하는 집단, 간호사를 적으로 생각하는 집단이 있다면 '간호사 개인 인성의 문제'라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그쪽으로 몰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환경이 좋을 때도 '태울 사람은 태운다'라는 주장도 있는데, 그건 물론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개개인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일거수일투족 통제할 순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으레 태움이 용인되고 흔하게 일어나는 일인 상황일 때보다, 좋은 근무 환경에 의해 태움이 훨씬 적어진 조직 분위기에서는 '태움' 행동이 더 수면 밖으로 드러나고 사람들의 인식과 감수성도 오르기 때문에 때문에 태움을 할 당사자도 좀 더 자제를 하려 할 수 있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그에 대한 대응을 하기 쉬운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결과적으로 태움은 분명 줄어든다는 것이죠.

 

저도 제가 경험한 '태움'이 그 선배 간호사들이 못돼고 악랄한 사람들이어서, 그래서 생긴 일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좋은 사람도 있었고 나를 못살게 군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를 힘들게 한 그분들도 분명 누군가에겐 좋은 친구이거나, 좋은 자녀이고 배우자이고 부모이기도 한 분들입니다. 어디선가는 좋은 사람일 때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까지 줏대가 뚜렷하고 강인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조직문화의 영향 속에서 휩쓸려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과 복지,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펼쳐도 사회가 개선되고 발전할 수는 있으나 모든 사람을 100% 행복하게 할 순 없고 범죄율, 자살률 등 좋지 않은 수치가 완전히 0%가 되기는 어렵듯이, 의료계의 정책과 조직 문화 또한 이와 마찬가지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태움'문제는 개인의 인성에 따라 그 정도는 달라질 수 있고, 개인의 노력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열악한 근무 환경과 시스템의 문제가 그 원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주저리주저리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듯 이야기를 했네요. 조금 무거운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공감이나,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알려주셔도 환영이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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